비슷한 단어들 동의어 반대말 청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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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불 전쟁 그리하여 1882년에 이홍장은 프랑스 공사 프레데리크 부레(Frédéric Bourée)와 톈진에서 담판을 시작하여 가조약 3조에 합의하였다. 즉 중국은 군대를 운남,귀주 성으로 철수시키고, 프랑스도 베트남을 점거하지 않으며, 베트남 국왕의 위신을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며, 보승(保勝)을 개항하여 중국과 프랑스가 여기에서 무역하며, 또한 이곳을 중국의 영토와 같은 비율로 세금을 징수하고, 중국과 프랑스는 경계를 설정하여 베트남 북부의 자치를 보호한다고 하였다.
청불 전쟁 프랑스는 혁명 이후 베트남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에 베트남도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858년 나폴레옹 3세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베트남을 압박, 사이공 등지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비엔호아(Bianhoa), 자딘(Giadhin), 딘뜨엉(Dinhtuong) 등 3성의 할양, 배상금 지불과 메콩강의 항해, 포교 특권을 인정하고, 또한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 내용의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불 전쟁 베트남은 프랑스의 공격을 받게 되자 '흑기군'(黑旗軍)을 불러들여 공동으로 프랑스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프랑스의 외교적인 압력아래 사이공에서 1874년 3월에 평화와 연맹조약(이를 '제2차 사이공 조약'이라고도 한다.)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불 전쟁 청나라가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자, 유곤일은 베트남에게 유영복의 흑기군을 초무하여 프랑스의 세력을 막도록 건의하였다. 또한 운귀총독 유장우도 흑기군을 이용하자고 건의하였다. 장지동도 중국의 국방을 번속인 베트남으로 확대하여야 된다고 적극적인 주전론을 폈다. 그러나 이홍장은 프랑스와 담판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청불 전쟁 결국 청불전쟁은 청나라로서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는데 패한 것이 되고, 프랑스도 제대로 승리하지 못한 채 승리한 셈이 되었다. 이로 인해 청나라는 프랑스와 또 다른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이는 앞서의 제1차 아편전쟁,제2차 아편전쟁과 달리 청나라가 어느정도 프랑스의 사정을 알고 있어 적절한 전략이나 전술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불 전쟁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 베트남 남부 6성을 할양받음과 동시에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한편, 베트남 북부에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 의용군인 '흑기군'과 연합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자 프랑스 함대는 타이완과 푸저우의 항구를 포격하고 청나라 군함(복건 함대)을 패퇴시키고, 청나라 상선들을 격침시키는 등 청국해군을 압도했다. 그 결과 1885년 6월 청나라 조정은 톈진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했다.
청불 전쟁 18세기 중엽에 프랑스는 인도에서 영국에게 패한 이후 베트남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남북 대립시기로 북쪽은 하노이에 여씨(黎氏)가, 남쪽에는 후에에 응우옌(阮氏)가 세력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1777년에 또다른 응우옌 씨가 후에를 빼앗고 하노이 마저 차지하였다. 이에 처음부터 후에에 있었던 응우옌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프랑스는 영토 할양과 프랑스인의 거주, 왕래, 상무의 독점 등 특혜를 조건으로 내세워 원조하기로 하였으나, 프랑스의 별다른 도움 없이 1802년에 후에의 응우옌 왕조가 다시 일어나 마침내 베트남 전역을 통일하였다.
청불 전쟁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이 조약(제2차 사이공 조약)에 대해 즉시 거부하는 입장을 표했다. 한편, 프랑스는 이무렵 보불전쟁에서 패한 이후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을 기도하고, 1881년에 프랑스 의회는 240만 프랑을 베트남에서 군비로 사용하도록 승인하여 1882년초에 프랑스 교지지나해군함대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H.L. Rivière)가 4월에 하노이를 점령했다. 그리고 다음해 1883년에는 흑기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청불 전쟁 1883년 8월에 프랑스는 무력으로 후에를 함락하고, 베트남과 '후에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고 비엔투안성(Bienthuan Provinces)을 프랑스에게 할양하며, 프랑스는 홍하의 양안에 군사 보급지를 설치하고 흑기군을 축출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주전파들은 베트남의 원조를 주장하였다. 단지 공친왕과 이홍장은 무력 사용을 반대하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여 '이홍장-트리코 회담'이 다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북위 20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이홍장의 주장과 북의 22도를 경계로 하자는 프랑스의 주장이 대립하여 결렬되고 결국, 프랑스는 무력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고자 흑기군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청불 전쟁 간명조약 체결 이후 철군 명령을 전해받지 못한 베트남 주둔 청나라 군대와 홍하를 순시하려는 프랑스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북려충돌'이라 부른다. 이 때 청조에서는 주전파 장지동을 다시 양광총독으로 임명하고 진보침과 장패륜을 광동과 복건에 보내 군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한편, 베트남에 있는 유영복을 데려오도록 하였다.